2011~2012년에 진행했던 KTH의 H3 컨퍼런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읽는 그 경험의 교훈들.
H3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배운 것들
2011년 늦가을, 저는 당시 다니던 KTH에서 H3라는 이름의 개발자 컨퍼런스를 처음 기획했습니다. 예산 승인이 떨어진 게 10월 20일, 행사가 열린 게 11월 30일이니 준비 기간은 정확히 50일이 채 안 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이 일이 제 커리어와 이후 만들 회사들(레진코믹스, 그리고 지금의 하다 스튜디오)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전혀 몰랐습니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당시 배운 것들을 다시 꺼내 보려 합니다.
시작은 단순한 문장이었다
H3는 딱 한 줄의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개발자가 행복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공개해보자.”
이 문장이 회사 안에서 공감을 얻으면서 행사가 가능해졌습니다. 대단한 기획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벤치마킹한 해외 사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왜 하려는지” 가 명확하게 한 문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이후 하다 스튜디오를 시작하면서도 저는 비슷한 연습을 반복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프로젝트는 아직 시작 단계가 아니라는 뜻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부 연사가 아니라 우리 개발자들
당시 국내의 큰 개발자 컨퍼런스들은 해외 유명 연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비싼 항공료와 강연료를 들여서라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외부 연사가 주는 권위와 마케팅 효과 때문입니다.
그런데 H3는 반대로 갔습니다. 25개 세션 전부를 사내 개발자들이 직접 발표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1. 우리는 팔릴 만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KTH는 당시 큰 회사였지만, 해외 연사를 대거 모셔서 팔 만한 브랜드 파워는 아니었습니다. 똑같이 돈을 쓸 거면 우리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하는 쪽이 더 가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2. 내부 동기가 더 중요했다. H3의 진짜 목표는 외부 참가자 수가 아니라 사내 개발자들의 자긍심이었습니다. “우리도 무대에 설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라는 감각. 그것이 한 번 생기면 회사의 기술 문화가 통째로 달라집니다.
결과적으로 H3는 “저비용 고효율” 행사로 평가받았고, 사내에서도 바깥에서도 좋은 피드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후 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콘텐츠다” 라는 확신을 남겼습니다.
디테일에 집착한 이유
H3를 준비하면서 놀랐던 점은, 아주 작은 디테일이 참가자 경험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세션 간 이동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 발표자 뒤 배경 디자인의 일관성
- 점심 시간 줄을 분산시키는 동선 설계
- 세션별로 발표자의 직무(기획/개발/디자인)를 명확히 표시
- 쉬는 시간에 참가자들끼리 말 걸기 좋은 공간 배치
이런 것들은 컨퍼런스의 “내용”과 무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가자가 “이 행사를 잘 준비했구나” 라고 느끼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이후 서비스를 만들 때마다 이 교훈이 반복됩니다. 핵심 기능은 기본이고, 실제 경험을 결정짓는 것은 그 주변의 작은 것들이다.
공개할 용기
H3가 끝난 뒤, 저는 “H3 개발자 컨퍼런스의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라는 긴 블로그 글을 썼습니다. 예산 구성, 일정표, 의사결정 과정, 실수한 부분까지 모두요.
이 글을 쓸 때 동료들이 걱정했습니다. “다른 회사가 따라하면 어떡해?”
그러나 저는 그게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내에서 이런 행사가 더 많이 생길수록 개발자 생태계가 풍요로워지고, 그 풍요로움은 결국 우리에게도 돌아옵니다. 내가 먼저 공개할 때, 커뮤니티는 내가 개척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줍니다.
이 태도가 그대로 이어져, 지금 GeekNews 운영기, Social 개발 이야기, Fairy 기획 배경 같은 글들을 블로그에 꾸준히 남기게 만들었습니다.
개발자 생태계라는 것
H3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개발자 생태계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조금씩 기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큰 회사가 큰 행사를 여는 것만으로는 생태계가 풍부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은 스타트업의 밋업, 개인 블로그의 꾸준한 글, 오픈소스 메인테이너의 한 줄 커밋 같은 것들이 모여 생태계가 만들어집니다.
하다 스튜디오가 오늘 하는 일들(GeekNews, Fairy 같은 프로젝트)은 모두 이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받아왔던 생태계의 혜택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H3는 이제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배운 태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 권정혁